2. 특별한 기록

친구의 대안결혼식 이야기 (사회 맡은 감상도 쪼끔)

김쥬🍀 2024. 10. 10. 22:04

* 대안결혼식이란? 표준화된 기성 결혼식과는 다른, 신랑신부의 소신에 따라 새로이 구성한 결혼식. 업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 만든다고 해서 DIY결혼식, 셀프결혼식이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 언니의 결혼식에 굳이 별칭을 붙인다면 대안결혼식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식 진행 중에는 정신이 없었어서 그렇다 치고, 전후로 사진을 너무 안 찍어둔 게 좀 후회스럽긴 하다. 후기 쓰고 싶은 생각이 들 줄 알았다면 언니 양해를 구해서 뽈뽈뽈 열심히 찍었을텐데. 바보김쥬. 그런고로 오늘의 후기는 설명 사진따위 없는 줄글로 이어진다. 

사진… 진짜 이게 다야… (1) 신부 교대 동기들이 보낸 화환 진짜 귀엽죠 (2) 1부 간담회 진짜 신선하죠 결혼식에 웬 간담회냐고요? 본문 읽으시면 알게됩니다 (3) 시작하기 전에 사회자 뷰 하나만 남겨놓고싶었다


언니는 평범하게 하진 않을 것 같았어

대안결혼식을 준비한 당사자의 결심 계기, 과정, 후기가 담긴 게시물부터 홍보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빠밤. 
https://blog.naver.com/hb_star/223612115040

 

DIY 결혼식 후기(대안결혼식, 셀프웨딩)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됩니다. 서론(대안 결혼을 생각하게 된 계기) 본론(베타 테스트(?) / 결혼...

blog.naver.com

 

10월의 첫번째 주말,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친구가 결혼을 했다. 언니랑 친해진지도 만 6년이 되었는데, 우리가 알기 전부터 함께한 오랜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식만 안 올렸지 꽤 예전부터 짝꿍이랑 함께 살고 있었는데, 코로나 방역 시기까지 겹쳐 지나면서 결혼식이 오래오래 밀리다가 드디어 날을 잡았다. 

두 사람이 오래 만났기도 하고 셋이서도 함께 친하게 지내다 보니, 어떤 결혼식을 하고 싶다, 이러저러한 행사는 싫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꽤 예전부터 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심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멋있게 해내는 우리 언니가, 이번엔 어떤 낭만을 담은 결혼식을 만들어낼까?

물론 기성결혼식도 좋은 구성이다. 어느 정도 표준화된 틀이 있는, 당사자와 가족들을 적당히 보여주고 축하받고 축하하고 관계를 공표하는 순서를 가장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행사. 하지만 벼르언니의 식은 절대로 평범하진 않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결혼식 하면 떠올리는 많은 이야기들, 결혼식은 부모행사라는 말도, 식의 주인공은 신부라는 말도, 주렁주렁 달린 장식에 화려하고 예쁜 인형이 되어 아빠에게서 신랑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거나 '유부-'에 대한 짓궂은 농담같은 건 언니가 정말정말 싫어할 것 같았으니까. 

 

진짜 이렇게 할 거라고? 

아니나다를까, 언니는 준비과정부터 눈을 질끈 감아가며 웃게 했다. 소강당에서 공연처럼 진행하고 싶다는 소망을 들은 적이 있었어서, 웨딩홀 대신 다른 장소를 빌려 스몰웨딩처럼 꾸며 하지 않을까~ 정도까지는 대충 예상을 했다. 근데 그녀는 거기서 나아가 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것과 결혼식에 꼭 필요한것/그렇지않은것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친구들에게 냅다 설문을 돌리더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결혼식의 구성요소를 뚝딱뚝딱 자르고 붙여 본인 맞춤으로 DIY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건 몰라도 설문은 진짜 예상 못해서 너무 재밌었다 ㅋㅋㅋㅋ 부부끼리만 생각해서 이거저거 다 빼고 넣는 결정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던걸까? 그 결정이 괜찮을거라는 근거와 용기를 조금 더 보태고 싶었을까? 준비하는 김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했던걸까?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여러가지 고민의 흔적이 묻어나는 설문 문항을 엿보는것부터가 즐겁고 기대되었다. 

우리 언니 너무 귀엽고 웃기지 않나요?? 메시지 공개에 벼르찌 허락은 받지 않았으나 부끄럽다면 요청 시 바로 지움

보통이라면 여기까지 보고 실제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당일날에야 짜잔! 하고 알았겠지. 하지만 사실 나는 너무나 영광스럽게도 언니가 내게 사회를 맡겨주어서, 준비 과정도 조금씩 공유받고, 결혼식의 구성도 미리 훔쳐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식순 구성의 변경 항목이라든가, 독특한 컨텐츠들에 대한 미리보기라든가. 언젠가 "결혼식에 가장 중요한게 뭐냐?"는 질문에 신랑이 "옆에 있는 사람…" 이라는 대답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다른 건 어떻게 되든 딱히 큰 상관이 없지 않을까. 그렇게 나온 식순은 ⬇


1부 식전행사: new 부부 토크쇼.
주로 친구들이 즐기기 좋을, 신랑신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
간담회: 왜 이런 결혼식을 하게 되었나
퀴즈쇼: new 부부에 대한 모든 것 

2부 본식
입장
맞절
혼인서약서
성혼선언문
편지교환식
축가
내빈인사
행진


 

여러모로, 비용적인 부담이 들어갈 수 있는 내용(예물이라든가)은 싹 빼고, '결혼식'이 가지는 의미 중 가장 코어가 되는 것(서약/선언/감사인사)만 남기고, 이런저런 주변 상황보다는 딱 신랑신부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개인스펙소개, 부모님, 집안이야기 등 배제)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신부가 '좀 엉성할 수도 있지만~' 이라고 말했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요? 양가 부모님이 괜찮다고 했으면 끝 아닌가용. 이 진행으로 부모님께 허락받기 위해 많이 준비하고 고민했던 것으로 아는데, 잘 헤쳐나간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ㅋㅋ 식전행사 퀴즈쇼 얘기는 처음 듣자마자 '와 이건 내 거 아니야!' 라고 했고, 그렇게 1부와 2부 진행자가 둘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진짜 탁월한 선택이었다. 난 최선을 다해서 1부 행사를 즐겼고 (ㅋㅋ) 내가 진행했으면 절대 이런 재미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저는 제 역량을 잘 알고있습니다 텐션업 즐겁고 센스있고 순발력이 필요한 썸띵은 내 전공 아님

이렇게 식순 구성만 보면 그렇게 막 특이한가? 싶죠? 근데 디테일하게 나열하면 진짜 특이한 거 많음. 

웨딩홀 대신 시민단체 강당
업체 없이 직접 강당 데코 (신부 어머님)
여성 진행자
화촉점화/부모님입장 없음
주례도 축사도 없음
보라색 미디 드레스
답례품 '책': 부부가 적은 소개문구만 보고 고르는 시크릿북
1부행사 >간담회 및 퀴즈쇼<
예물교환 대신 편지
부케 토스 없음
술집 뒤풀이 (근데 이제 신랑신부가 참석/주도한)

컨닝페이퍼(=언니가 정리한 거) 안 보고 내가 지금 당장 기억나는것만 쓴건데, 정오표 맞춰보니 많이 빼먹었네… 정답지 궁금하신 분은 상단에 적어둔 결혼 당사자 블로그 가서 후기 보세요 (https://blog.naver.com/hb_star/223612115040)

 

사회 썰을 조금 풀어볼까

친구 결혼식 사회 준비한다고 하니까 '나 결혼식 여자 사회자 처음 봐.' 이 소리를 세번쯤 들었는데 그때마다 내 대답도 이랬다. '저도 처음 봐요 근데 그게 저네요… 하핫' 

아니 근데 이 얘기 하려고 대화내역을 거슬러 올라가며 되짚어보니 내가 먼저 '언젠가 결혼식 사회를 한 번 해보고싶다'고 했더라?? 날짜를 보아하니 아마 연구실 행사 신나게 뛰고 와서 "행사진행하는거 너무 재밌다 좀 더 크고 진지한것도 해보고싶어~" 하고 텐션 가득 오른 상태에서 한 말이었나본데, 아마 평소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필 그 순간에, 하필 언니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했고, 언니가 나를 믿고 맡겨준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 언니 우리… 웬만해선 하지 않을 행동을 한 순간들이 우연찮게 서로에게 닿아서 특별한 많은 이벤트를 함께하는 걸 보면 진짜진짜 신기한거같아… 정말 우린 어떻게든 가까워질 운명이 맞았던 게 아닐까? 

하 잡소리가 길었죠. 우리가 왜 친해졌나를 생각하면 뭔가 이해가 잘 안 돼서 알 수 없는 물음표뿐인데, 가까워지고 나니 너무 좋아하게 된 운명같은 사람이라 주절주절 할 게 많음.

어쨌든!

그렇게 나는 2024년 결혼식의 사회자로 2022년 1월부터 내정되어 있었고 (심지어 2024년일줄도 몰랐음 '언젠가의' 결혼식…)ㅋㅋㅋ 날짜와 식순이 정해진 시기쯤부터는 대본 초안과 수정본을 주고받으며 안내 및 진행의 내용을 정했다. 처음 맡아보는 일이지만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친구의 식이기 때문에 진짜 잘 하고 싶었다. 대본 작성과 연습 과정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렇게 세 가지였다. 

1. 문장이 너무 길거나 복잡해서 들을 때 혼란이 생기지 않을 것
: 문장이 길다면 자르고, 어절 순서를 바꾸어 수식하는 어절이 가까이 붙어있도록 변경. 
: 자를 수 없는 문장은 쉬어가는 포인트를 명확히 표시해두기
2. 다른 단어와 헷갈릴 수 있는 발음은 최대한 배제할 것
: 내용을 외우기 전, 녹음해서 대본 없이 들어보면서 수정
3. 이건 경상도 사투리 구사자였기 때문에 신경쓴건데, 가로모음과 초성 발음에 힘을 줄 것
: 남부지방으로 갈수록 말할 때 입술모양의 변화가 게을러서 (당사자성 많은 발언입니다) 발음이 뭉개지는 경우 多

그런데 사회를 진짜 많이 본 오빠가 연구실에 있으셔서 슬쩍 팁을 여쭤봤더니, "대본을 잘 쓰고 내용을 잘 외우고 하는 건 다들 하는거야, 누구나 그렇게 준비해. 제일 중요한 건 돌발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느냐, 그거야." 라고 하셨다. 그래서 세 가지에서 네 가지가 되었다. 

4. 돌발상황 대응 준비
: 상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최대한 생성해두고, 시간끌기/문제안내/양해부탁을 위한 멘트 준비
: 소품 전달/회수, 축가 인원(합창이라 사람이 많았다!) 입/퇴장, 조명/프로젝터 등의 on/off 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생각하고 예비 멘트를 준비했다. 
: 안 쓰면… 제일 좋지만… 요긴하게 쓰였다. 

사실 대본 초안을 사회자가/결혼당사자가 하는 경우가 둘 다 반반쯤 되는 것 같은데, 1) 내가 전문 사회자가 아님 2) 셀프웨딩이라 식순이 보편적이지 않음의 이유로 초안을 신랑신부가 채워주었다. 위 네 가지 항목을 생각하면서 초안에서 조금 더 채웠으면 하는 부분들을 보충하고, 내가 발음하기 편한 문장으로 고치고, 천천히 읽어보며 각 부분별로 소요시간을 정리해 전달했다. 그 과정에서 확인이 필요한 부분들을 논의하고, 그렇게 두어번 수정을 거쳐 최종본을 만들었다. 

이 내용들은 모두 문서 파일로 정리했는데, 아무래도 문단 단위로 나뉘어진 줄글 형태는 시선이 잠깐 떨어졌다 돌아왔을 때 제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여러 상황을 동시에 확인하며 내용을 참고하기에 불편함이 조금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마지막 최종본은 '한 번에 이어서 안내할 문장' 단위로 최대한 쪼개어 엑셀로 식순/시간/참고사항과 함께 정리했다. 그리고 잘 한 선택인 것 같아… 중간에 놓칠 일 없이 훨씬 편하더라…….

실전용 대본 구성 + 식전 체크리스트. 이게 내가 다 썼으면 대본 공개를 할 텐데 초고를 언니가 써줘서 쫌 그래…

아무래도 전체 식순 내용을 당사자 빼고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나였을텐데, 당일 현장에서 당사자들은 이래저래 정신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최소한 식 진행과 관련된 부분은 내가 책임지고 챙겨줘야지! 하는 소망이 있었다. 엄청엄청 여유있게 일찍 가서 양가 부모님들과 도움주시는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미리 적어간 체크리스트를 확인했는데, 이것도 솔직히 잘한 점이지 않나 ㅎㅎㅎ 생각한다. 

준비는 이것저것 열심히 하긴 했는데, 준비한만큼 실천하지 못해 아쉬웠던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첫번째는 발음! 나는 (아마도) 사투리 발음의 습관 때문에 가로모음의 발음이 다소 불명확하고 느린 편이다. 이걸 알고 있어서 발표할때나 노래할때,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는 입모양에 신경을 쓰는 편이고, 이 날도 패드 귀퉁이에 '발음주의'라고 써 뒀었다. 두번째는 발성 방법. 예식 초반/마지막에는 목소리를 밝게 쓰고, 성혼선언문이나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는 무겁게 쓰고 싶었다. 그런데 발음과 발성 둘 다 식 초반에는 신경을 쓰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소홀해져서 좀 아쉽다. 

한 번 더 하면 아쉬웠던 점들을 더 잘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기회가 있을까?? 사실 없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는 신랑의 남자인 친구에게 부탁을 하거나, 전문 사회자를 섭외하는 게 보통이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잘 기억해둬야지. 

 

후일담

비혼주의까지는 아니지만, 언젠가 결혼을 꼭 하겠다는 의지도 결혼에 대한 로망도 딱히 없는 나는, '나중에 결혼한다면 이런 결혼식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날 '이런 방식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의 주인은 부모님이 아니라 신랑신부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보단 의미라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친언니가 이미 식을 크게 올렸기 때문에, 나 한명 정도는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양가 부모님이 영 싫어하시면 본식은 어른들 모시는 용으로 제대로 하고, 친구들끼리 파티처럼 작게 한 번 더 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상상해볼 정도로 이 결혼식은 '재미가 있었다'.

사실 결혼식을 다녀오면, 어지간히 식사가 맛있고 축가가 특별하고 식장이 화려하지 않은 이상 식 자체가 기억에 남는 건 딱히 없다. 축의금 내고 신랑신부 보고 겸사겸사 겹지인 친구들 좀 만나고 박수 좀 치고 사진 찍고 밥 먹고 오는거지. (절대로 이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앞서 말했듯, 할 건 다 하면서 예쁜 그림도 만들면서 가장 효율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번 결혼식은 당장 생각나는 것만 꼽아도 한 손을 다 쓰고 모자란다. 재미있었다. 심지어 어르신들도 영상을 찍고, 퀴즈 어떻게 참여하는거냐며 궁금해하시고, 독특한 구성과 특별한 드레스, 귀여운 버벅임에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내주실 정도로, 재미있었다. 

 

언니는 자기의 결혼식을 '대안결혼식'이라고 불렀다. 1부 순서에서 언니가 이야기한 비유가 인상깊었다. "정규교육과정이 정말 훌륭하게 구성되어있긴 하지만 개인의 소신에 따라 대안학교를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 것처럼". 누가 교육과 다니는 사람 아니랄까봐 ㅋㅋㅋ 스스로가 결혼식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만 담은 결혼식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내가 본 결혼식들 중,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갈 결혼식들 중에서도,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결혼식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