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과 생각/1.1. 생각조각

헌혈의 집 가는 걸 좋아한다.

김쥬🍀 2024. 11. 21. 12:23

사실 나한테는 봉사활동이라기보단 자기효능감을 쉽게 채우는 방법 중 하나이다. 너무 되는 게 없는 기간에 마음이 힘들 때, 헌혈이라도 하고 오면 '오늘은 나 좀 쓸모있었다' 싶은 기분에 힘이 약간 난다. 

고등학생 때 기숙사 학교여서 주중엔 내내 학교 안에만 있어야 했었는데, 달에 두어번 쯤 공식적으로 학교 밖을 나갈 수 있는 활동이 있었다. 거점국립대와 교류하면서 지도를 받는 뭐 그런 활동이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당 교수님은 이름 빌려주고 지원금 받고, 학생들은 생기부 세특실적 채우고 연구실 구경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어쨌든 고등학생 나부랭이가 지거국 교수님께 최신연구분야에 대한 간단한 세미나를 직접 듣고, 대학원생들의 실험 과정을 어깨너머로나마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 때의 나와 친구들은 그게 그렇게 특수하고 좋은 기회인지 잘은 몰랐고, 그냥 합법적으로 외출해서 저녁 나들이를 할 수 있는 찬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참여한 분야는 나를 제외하곤 다 남학생이어서 내가 친하게 지내거나 따로 모여 노는 무리가 없었고,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친한 친구들이 참여했던 연구실은 실험 과정 상 활동시간을 거의 다 채우고 돌아오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경우 저녁 이후 학교로 돌아가기 전까지 혼자 자유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초반에는 머쓱해서 그냥 학교에 일찍 돌아가 정독실에 콕 박혀있었는데, 괜히 아쉬워서 한번두번 그냥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는 날이 잦아졌다. 괜히 카페에 앉아있기도 하고, 도서관 구경도 가 보고, 대학로 상가를 구경다녀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게 헌혈의집이었다. 고등학생도 되나? 하고 그냥 들어갔다. 딱히 헌혈로 봉사활동을 채우겠다든가, 기념품이 탐이 났다든가, 그런 이유는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나이제한조건은 만16세로 높지 않았는데, 건강자격조건이 이것저것 엄격했다. 사실 그 땐 수치같은 걸 잘 몰라서 그냥 검사해보고 안되면 안된다고 하겠지 뭐~ 했는데, 성인 되고 나서 보니까 의외로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도 그럴 게, 150cm 대의 마른 여자들은 45kg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기립성 저혈압이라도 있으면 혈압 조건에서 패스, 생리 중이라 컨디션이 안 좋으면 또 불가능하고, 여드름 치료같은 피부과 약을 먹으면 또 배제된다. 거기서 이제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거나, 항생제진통제소염제 중 제한성분이 있는 약을 먹었거나, 피어싱이나 문신을 했다거나 하면 또 우수수수수…….

하지만? 대한민국 여성 평균키의 표준 체형인 김쥬는 체격조건 안 맞을 일이 없었고요. 어릴 땐 생리통도 없어서 약도 잘 안 먹었다. 식탐이 없지 않아서 먹을 건 또 잘 챙겨먹었기 때문에 밤을 새거나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컨디션이 나쁠 일도 별로 없었다. 하다못해 팔 안쪽 혈관마저 튼튼하고 잘 보여서, 간호사 선생님이 혈관 너무 좋다고 칭찬한 적도 있었다. 나약한 위장과 면역계, 끔찍하게 근육이 안 붙는 몸뚱이지만 튼튼한 골격계와 웬만해선 문제가 안 생기는 심혈관계 수치. 튼튼한데 안 튼튼하고 안 건강한듯 건강한, 미묘한 신체조건을 가진 나같은 사람에게 꽤 잘 맞는 봉사활동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건강진단에서 수치가 나빠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적은 없을 정도다.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는 기간만 맞으면 외출할 때 헌혈의 집에 들렀다. 헌혈하고 온 날은 피곤해서 그런지 미묘하게 졸려서 3차 자습시간에는 졸음을 쫓아내기가 힘들긴 했는데(보통은 그 싸움에서 졌다), 그래도 차곡차곡 헌혈증이 쌓이는 게 묘한 뿌듯함이 있었다. 

대학 오고 나서는 학교 기숙사에서 시내 헌혈의 집에 가는 게 좀 번거롭기도 했고, 이래저래 해외 일정이나 크고작은 질병으로 복용하는 약 때문에 부적격인 기간이 길어서 한동안 헌혈을 못 했다가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 다시 열심히 다녔다. 사실 나한테는 헌혈 자체도 그렇고 성분헌혈의 항응고 약물이 엄청 큰 부담이 되지도 않아서 성분헌혈도 전혈헌혈도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시간도 많고 컨디션도 좋은 날은 혈소판도 종종 하는데, 뭐 여자분이 굳이 혈소판까지 하냐, 하는 이야기도 가끔 듣지만! 할 수 있는데 안 하면 아깝잖아요. 혈장이랑 전혈은 많이들 하지만 혈소판은 안그래도 보관기관도 짧고 늘 부족하다는데 못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걸 최대한 하는 게 system optimal적으로 좋은 거 아니겠어요. 

한 번 두 번 하다 보니, 30회를 채우면 주는 은장이 곧 코앞이다. 헌혈 간격 제한이 2달인 전혈 헌혈을 위주로 한다면 30회라는 조건이 꽤 많지만, 성분 헌혈과 전혈 헌혈을 번갈아가며 하면 사실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다. 어릴 때 서른까지 은장을 따야지! 하는 작은 목표가 있었는데, 연말 스케쥴을 잘 조정하면 이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은장 받고 나면, 30대 안에 금장도 받는걸 목표로 하고 싶다. 몸 관리 잘 해서 나이제한조건 채울때까지 계속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