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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비행 징크스

김쥬🍀 2024. 11. 14. 00:28

누구나 '난 이상하게 A하면 B하더라.'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친구는 반장부터 국회의원까지 자기가 투표한 대상은 늘 당선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운동경기를 직관하면 꼭 이기는 승리요정이라고 했다. 나는, 혼자 비행기를 타면 십중팔구 옆 사람과 말을 트는 징크스가 있다. '징크스'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지만, 이런 류의 미신적 현상을 나타내는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으니 그냥 징크스라고 하자. 

혼자 하는 비행이라 함은, 지인이 아예 없는 이동일정이 기본이지만, 같은 비행기를 타는 일행이 있어도 자리가 멀어서 사방 5줄 사이에는 아는 사람 없이 나 혼자일 경우도 포함된다. 오히려 근처에 일행이 있으면 비행 시간 내내 밥먹을 때 빼곤 묵언수행 할 때가 많은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일본 여행을 가려다 여권 문제로 비행스케쥴이 밀려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뒤따라갔던 날, 교수님이 나를 버리고(ㅋㅋ) 혼자 비즈니스 클래스로 승격되신 날(사실 이건 오히려 좋아 럭키비키), 좌석 선택 눈치싸움에 실패해서 친구들은 다들 뒤쪽 자리인데 나 혼자 캐빈 앞쪽에 자리했던 날, 나는 아부다비에서 친구는 한국에서 날아와 만나기로 했던 날. 전부 옆사람이 말을 걸어왔다(당연하지만 절대로 내가 먼저 말을 걸진 않는다).

개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승객들이 몇 있다. 첫번째로 꼽아보자면 미국에서 돌아오는 대한항공편이었는데, 기내식으로 나는 소고기요리를 시켰고 옆자리 백인 남성분은 비빔밥을 시켰다. 옆자리 아저씨는 힐끔힐끔 나를 보더니, 왜 비빔밥을 안 먹냐고 (ㅋㅋㅋ) 물어봤다. 그럴 정도로… 기내식 비빔밥이 막 맛있나…?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행선지, 직업, 각자 방문해본 여행지, 한국에서 좋아하는 곳들(이 분은 한국에 많이 오는 편이라 꽤 여러 도시를 들러봤다고 했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나중엔 미니어처 위스키에 탄산수를 받아서 야매 하이볼까지 나눠 마셨다.

또 한 사람은 아부다비에 갈 때 만난 교환학생이었다. 그 친구는 아부다비를 거쳐 프랑스로 간다고 했고, 비슷한 나이대인 것 같아서 나도 교환학생을 가는 것인지 궁금해서 말을 걸었다고 했다. 아니… 저는 학부를 이미 졸업했어요… 출장가는거예요……. 같이 가는 친구와는 자리가 멀리 떨어져서 심심했다는 그 학생은 학교생활, 취미활동, 연애사 같은 잡다한 이야기를 한참 조잘거렸는데 너무너무 귀여웠다. 겨우 3년 차이인데 왜 다르지?! 그 친구는 대학원에 대한 궁금증도 되게 많았는데, 분야가 달라서 도움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해 아쉬웠다. 서울 소재 대학에서 경영학 전공하다 3학년 때 교환학생 갔던 여학생 아직 잘 지내고 있나요? 대학원에 갔나요, 취직을 했나요? 어느 길을 갔든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시길 바랍니다. 

스위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한 살 어린 남자분도 기억에 남는다. 그 때 한창 빠져있던 모바일 게임을 거의 4시간 내내 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냐고 (ㅋㅋ) 말을 걸어왔다. 심심한데 인터넷은 안 되고, 기내 영화는 취향인 게 없는데 잠은 안 오고, 그래서 수다라도 떨고 싶어서 말 걸려고 했는데 내가 고개도 안 들고 게임만 하고 있어서 두시간동안 눈치를 봤다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분은 첫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 예정인데, 퇴사 일정을 잡아두고 모아둔 휴가를 몽땅 털어 3주간 유럽여행을 했다고 했다. 근데 축덕이라 거의 축구장에만 있었다고. 한인민박에 주로 묵었는데, 축구 좋아하는 다른 남자분들이랑 일정 내내 축구 얘기 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고 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조잘거리는 사람의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참 재밌다.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여도, 그냥 그 사람이 즐거워하는 에너지가 좋다. 음… 그런데 이 분이랑 이야기할때는 뭔가 기분이 묘했던 게, 나는 아직도 학교에 남아있는데 이 분은 나보다 한 살 어린데도 일찌감치 회사생활을 열심히 하고 심지어는 이직도 한다니까 느낌이 이상했다.

가끔은 되게… 별로 안 궁금하고 길티한 tmi를 종일 이야기하거나, 주변 다른 승객이나 승무원에 대한 험담만 하거나, 아니면 나에게 쓸데없는 간섭이나 인생조언을 하려는 사람도 만나긴 하지만… 그래도 길어야 10시간쯤 보고 나면 다신 안 볼 확률이 높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실 나는 누가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게 그렇게 싫진 않다. 오는 1월에도 긴 비행의 출장 일정이 있는데, 좌석 선택은 일행들과 따로 할 테니 아마도 또 혼비행이 되겠지. 그 때는 또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될지 궁금하다.


아, 근데 누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너 super I라면서 그런 건 또 잘 한다?" 라고 했다. 거 내향인은 사회교류능력 떨어지고 타인과 절대 말을 못 하는 소심이가 아니라니까는… 다들 사회성은 있어요. 교류하면서 배터리가 빨리 닳을 뿐이지. 내가 서른번쯤 말했는데 이제 좀 외워주라.